'멤브레인'에 해당되는 글 1

  1. 2007/11/02 24만원짜리 키보드, 레오폴드 토프레 리얼포스 101 (12)
약 7년 전, 아론이라는 회사의 기계식 키보드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것이 아니라 회사 자산이었죠. 제가 사용했었구요. 때가 꼬질꼬질한, 그저 별 볼일 없는 키보드였어요. 당시 기계식 키보드를 접한 게 처음이었는데, '딸깍딸깍' 느낌 참 좋더군요. 키보드를 두드리면 두드릴 수록 흥이 난다고나 할까요?

당시 다니던 회사가 월급을 6개월 이상 주지 못했던 터라 다른 회사로 옮기면서 제 소유가 되었습니다. 기계식 키보드의 그 느낌을 잊지 못해서 옮긴 직장에도 이 키보드를 가져다놓고 쓰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한테 욕을 좀 먹었죠. 시끄럽다고.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쓰는 내내 두드리는 기쁨을 줬던 키보드였던 것 같습니다.

이 키보드가 망가진 다음에는 일반 멤브레인 방식의 키보드를 사용했습니다. 뭐 사실 저는 입력 장치에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편이 아니어서 가격이 몇 배나 비싼 기계식 키보드를 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돈도 없었고 말이죠.

물론, 가끔씩은 기계식 키보드의 그 경쾌함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소리가 엄청나게 크긴 하지만 '내가 지금 무엇인가를 열심히 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릴 수 있으니 윗분들께 일 많이 한다고 어필할 수는 있겠네요. ^^

요즘은 이러한 기계식 키보드보다 '정전용량 무접점 방식'이라는 다소 어려운 용어를 쓴 키보드가 인기를 얻고 있더군요. 가격을 살펴보니 엄청나게 비싸네요. 제가 지금 쓰고 있는 레오폴드 토프레 리얼포스 101의 경우 가격이 24만 원이나 합니다. 헉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비싼건지 물어봤더니 제품의 독특한 설계 구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멤브레인과 기계식 키보드는 키를 누르면 어떤 방식으로든 내부 PCB 기판과 '접촉'을 해서 눌러졌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기계식이냐 멤브레인이냐의 차이는 직접 닿느냐 중간에 뭐가 있느냐에 따라 생기는 것이구요. 그런데 이 정전용량 무접점 방식의 키보드는 말 그대로 접촉을 하지 않습니다. 키를 누르면 전류가 생겨서 그것이 전달되어 키가 눌러졌음을 알리는 방식이죠. 그러니까 키캡과 내부 PCB 사이에는 접촉을 위한 어떠한 장치도 없습니다.

이처럼 비싼 값을 받는게 뜨기 위한 상술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키감은 상당히 좋습니다. 기계식이 딸깍딸깍, 멤브레인이 뭉텅뭉텅 느낌이라면 이 제품은 뭐랄까, 딸깍딸깍과 뭉텅뭉텅 중간에 있다고나 할까요? 가벼우면서 무겁지도 않고 아주 경쾌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그런 키감입니다. 직접 쳐보셔야 알 것 같습니다.

참고로 가로로 짧은 해피해킹 키보드도 이 제품과 같은 정전용량 무접점 방식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는 분 와이프께서 전산 쪽에 종사하는데, 한 번 쳐보곤 그 다음날 바로 지르셨다는 -_-

여튼 뭐 이 제품 겉모양 보면 정말 24만 원짜리 제품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들어보니 묵직한 게 조금 다르긴 하군요. 그러나 윈도우 키도 없고(윈도키 + E로 탐색기 자주 띄우는 저는 조금 불편하긴 하더군요), 각종 단축키 같은 것도 없습니다(그러나 이거 100% 활용하는 사람도 사실 찾기 힘들어요). 무선 기능도 당연 없구요.

'에이! 이게 뭐야'라고 생각했지만 한 2주간 써보니, 그냥 저냥 좋다는 얘기밖엔 할 수가 없습니다.  인체공학적 디자인이라고 이리저리 틀어놓은 제품, 슬림형 디자인이랍시고 엄청 얇게 만들어놓은 제품, 보기만 좋은 이런 키보드보다는 상당히 편하게 타이핑을 칠 수 있었습니다. 칠 때마다 느껴보는 좋은 기분도 오랜만에 느껴보구요. 이런 좋은 기분과 편안함은 단순히 키감 만으로는 얻을 수 없죠. 키와 키 사이의 간격, 기울어진 각도, 구성(이건 뭐 표준형에 거의 근접한 모델이니 ^^) 등 여러 요건이 합쳐져야 합니다.

점수로 따지자면 100점을 주고 싶습니다. 정말 가지고 싶은 제품입니다. 그러나 돈을 주고 구입하기에는 너무나 비쌉니다. 이 정도의 돈을 지불하기에는 제가 입력장치에 부리는 욕심이 그리 크지가 않군요.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도, 다른 생각을 가진 분도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해서 이 제품에는 별 3개를 줬습니다.
2007/11/02 20:12 2007/11/02 20:12